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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참 많다. 한국 사람들끼리의 대화 속에서는 “한국이었으면~”을 자주 듣는다. 투덜거리면서도 이 땅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명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번에 만난 <평범한 사람 이야기> 두 번째 주인공은 몇 가지 단순한 이유들을 이야기한다. 단순화시켜서일까, 방향이 뚜렷하고 그 선택 안에서 유연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읽힌다. 혹여 당신이 만족의 결핍 또는 불안의 과잉을 경험하고 있는가? 특히 그중 많은 부분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면, 과연 나는 ‘나의 선택에 집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하게 하는, 담담한, 당당한, 단단한 외노자 이승우를 만나보자.

SEOYOUNG AN

자기소개 부탁한다.
SEUNGWOOLEE    

안녕! 이탈리아에 2012년도에 넘어와서 3년 학교 다니고 15년도 말부터 남성복 모델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9월생 처녀자리 이승우라고 한다.
SY 

학생 3년, 어땠나?
SW

2012년 7월 13일의 금요일에 밀라노에 왔다. 밀라노에서의 기억은 좋을 수밖에 없다. 학교 다니면서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는데 좋을 수밖에. 남성복 2년 과정을 밟을 때 우리 반 총인원이 15명. 근데 한국 사람이 11명이었다. 나중엔 선생님들이 “여기”, ”저기”라며 한국말을 하더라. 그땐 이게 너무 화가 나더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나’하는 생각 때문에. 그 당시 한국에 클래식 남성복이 한참 붐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되게 많이 유학을 나왔었다.
SY
3년의 학생 시절에서 6년을 채워가는 직장 생활로 넘어간 그 시점이 궁금하다. 그리고 6년의 속도감도.
SW

처음 밀라노에 왔을 땐 그저 남성복 메이킹을 더 배우기 위해 왔다. 졸업 후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겪는취업난을 지켜보며 이곳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하고 기회가 적은 한국보단 이 땅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도를 해보던 중에 있었다. 학교를 통해 일을 구했고 하다 보니 어느새 5년이 흘렀다. 그 5년 안에서도 처음 인턴 6개월을 거치고 나니 (인간의 바람이 끝이 없듯) 정직원도 돼보고 싶고.. 또 정직원이 되니 흥미롭게도 정직원 안에도 레벨 1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 그래서 레벨 하나씩 오르는 재미로 다니다 보면 어느새 여름휴가 맞이하고 휴가 즐기고 돌아와서 다시 일하고 연말마다 레벨 오르는 걸 또 기대하게 되고. 다시 연휴 마치고 일하고 또 여름이 오면 한국 한번 다녀오고. 또 연말 되면 해 바뀌고 또 여름 시즌 준비하다 휴가 맞이하고... 그러다 보니까 되게 금방 가버렸다.
SY

직장 생활의 배경, 레자 소개도 부탁한다.
SW

밀라노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일 때문에 레자라는 시골 동네에서 살고 있다. 처음엔 엄청 두려웠다. 학교에서 이 회사를 소개해 주고 합격 후 “이제 너 레자에 갈 거야”라고 했을 때 난 어딘지도 몰랐다.라고 마죠레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을 해줬지만, 당시 내게 라고(호수)는 꼬모뿐. 레자는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다 알고 지나가면 다 인사한다. 한국 사람은 나 한 명뿐이다. 그냥 뭐 전반적으로 사람이 없다. 첫인상이라 할 거라면 호수, 좋은 공기. 이곳은 내가 직장인의 삶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여름이면 카약도 타고, 취미로 테니스도 치게 됐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런 장소는 나와 맞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더라. 노년에 살고 싶은 동네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너무 누려서 나이 먹고 못 쉴까 봐 겁도 난다.
처음 회사에서 숙소를 제공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나중에 다 잘 될 거니까.. 시골 쪽방 한편에서 살아도.. 이거 다 내 이야기가 될 거고 전부 특별한 소스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왔다. 제공해 준 숙소가 기대보다 좋았다. 아늑했다. 첫 2년 정도는 회사 마치고 집에서 책 보고, 영화 보는 게 전부였다. 그 당시에 1년에 영화를 약 300편 정도 봤다. 밖에서 뭘 할 생각을 안 했다.
SY

곧 떠날 사람 같은 마음으로 있었나?
SW

그런 마음도 있었다. 첫 2년 정도는 이곳은 마치 버스 정류장 같았다. 난 그저 내 버스가 오면 타는 거고, 굳이 내 옆에 함께 기다리는 사람과 친구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SY

그렇게 6년. 버스를 기다렸다.
SW
버스가 안 오더라. 돈 모아서 비행기도 타고 해야 하는데 버스만 기다리니까. Sciopero(파업)도 많고.
SY

쉬운 선택이 아니다. 타지 생활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사는 것, 용기가 많이 필요했을 것 같다.
SW

그렇다. 쉽지 않다. 하지만 남성복 메이킹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대부분이 밀라노 같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 자리 잡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밀라노에 사무실을 두고 일하며 여성복 모델리스트까지는 같이 일하지만, 남성복의 경우 거의 밀라노 주변 지방에서 일한다. 슈트의 경우에는 멀리 나폴리까지도 간다.
SY

꿈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SW

맞다. 난 어디서 뭘 하든 내가 좋아하는 옷 만들기를 하고 있으면 된다. 선택을 했으면 집중을 해야지.
SY

일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SW

한동안 아침형 인간에 꽂혀 있었다. 새벽 5시에 기상 후 30분 조깅. 5시 반부터 30분 동안 언어 공부를 한다. 6시부터 출근 준비 후 독서 조금, 6시 40분에 출근. 출근길에 영어 듣기를 마저 하고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한다. 5시 퇴근 후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책 보고.... 공부 시간 채운다.... 이렇게 한 달 정도 하다가 출근길에 영어 대신 음악을 틀었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순간 나는 내가 총 맞은 줄... 너무 피곤해서 지금 약간 주저앉았다. 요즘은 6시 반에 일어나자마자 주식을 확인. 저금 대신 먹고살기 위해 조금씩 공부하며 투자하고 있다. 아, 스니커즈 시세도 꾸준히 확인하고 있다. 늘 응모할지 말지의 고민을 하며 지낸다.
SY

개인의 전문 분야 이외에도, 다양함으로 꽉 채워 살아가는 인상을 준다.
SW

퇴근 후가 존재하는 삶이라. 시간이 많아 여러 가지 일을 해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직장 생활 하는 사람들이 가장 한국으로 가고 싶은 이유 1순위는 돈인 것 같다. 나 또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일만 보았을 때 충분히 만족하지만, 그에 따른 보상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하게 된 여러 부수적인 일들이 있다. 책도 써보고, 가끔은 빈티지 램프 바이어가 되기도 하고, 블로그 광고료 통해서도 수입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동안 활동을 했었다. 근데 구글에서 내게 광고 승인을 안 해줘서. 글 쓸 맛이 나겠나, 안 나겠나. 별거 다 썼었는데. 전문적인 것 부터 취미 수준의 소소한 거리들까지. 하지만 확실한 건 이곳이, 유럽 베이스가 훨씬 부수입의 기회가 많다고 느낀다.
SY

질문을 한 층 더 좁혀보겠다. “외국인”으로 9년째 사는 건 어떤 느낌인가? 궁금하다. 언어, 문화, 인간관계 등 여러 범위 안에서.
SW

9년 차 외국인, 처음 1-2년 차 땐 내가 언어를 못 해도 창피하지가 않았다. 한 3-5년 차가 되면 이게 되게 창피해진다. 어딜 가서 말을 못 한다. 쌓이는 연차에 비해 언어 실력이 비례하지 않을 때다. 계속 공부해야지 하다가 이제 9년 차. 어지럽다. 쓰러질 것 같고. 이런 얘기 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어쨌든 나도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나름 자기 합리화를 해보자면, ‘나는 이탈리아 꼬마 8세와 비슷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그 친구랑은 한번 해볼 만한 느낌. 억양이나 악센트는 잘 해내고 싶었지만 초반뿐이지 지금은 내가 한국인이니까 나오는 발음대로 당당히 대화한다. 언어는 구조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콘텐츠에 집중해서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어떤 면에서는 유튜브랑 비슷하다. 고가의 장비로 고화질 4K 영상을 올려도 내용이 없으면 안 보게 되더라. 반대로 저화질에 편집이 좀 별로여도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되는 영상들이 있다. 내 의사소통도 이런 맥락으로 방향성을 잡았다. 화질보다는 콘텐츠! 이탈리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 어렵다. 한때 이태리 친구들과의 교류에서 언어 훈련이나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기대로 자주 만남을 가지려 노력 했었다. 그중에 예의 없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사실 너무 당연한 건데, 내가 말을 잘 못 하거나 발음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냥 눈 감고, 참던 때가 있었다. 지적까지는 넘어가도 그걸로 막 장난치고 무안 주는 친구? 아니 그런 이탈리아놈이 있더라...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기면 말을 잘 못 해도 내 의사를 표현한다. “너 왜 그렇게 말해? 나 너랑 말하기 싫다.” 한번 하니 두 번은 쉽더라.
SY

솔직히 나눠주어 고맙다. 외국인이라서 겪은 슬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SW

금요일마다 테니스를 친다. 저 저번 주에 테니스를 치고 나니 엄청 깜깜해져 있었다. 암흑이었다. 함께 테니스를 친 쟈꼬모(17)와 다비데(16)는 어머니들이 데리러 오셨더라. 내(서른 좀 넘음)가 외국인이어서 우리 엄마(58)는 안 오신 거겠지? (한참 웃는다).
SY
서류상 당연히 외국인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또 더욱이 직장 생활을 할수록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가벼운 외국인이기도 힘들며 완전한 이민자이기도 힘들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 해뒀는가?
SW

지금까지는 나를 외국인으로 봐주는 게 나도 편하고 좋았다. 근데 여기서 앞으로 더 먼 미래를 본다면 내 책임의 영역은 지금과 확실히 다를 것이다.
SY

특히나 직업인으로서 좀 더 욕심을 내고자 한다면 외국인 앞에 그어져있는 선을 조금씩 침범, 한 단계의 도약이 필요한 것 같다.
SW

공감한다. 실제로 올 초, 고민의 결과로 언어 공부를 더 하기 시작했다. 내 윗선의 상사들은 내가 옷으로 말할 때, 그들은 말로 말하기 때문이다. 나도 솔직히 나중에는 입으로 일하고 싶었다.
SY

그럼에도 언어나 그 외의 부수적인 이유가 현재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SW

옷을 잘 만드니까. 또 손이 빠르고. 내가 일하고 싶어 하는 곳에서 나를 빨리 알아야 할 텐데... 시간 싸움이다.
SY
일을 정말 좋아한다. 일을 계속하며, 이 곳에서 더 깊숙이 정착해 살아가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가?
SW

내가 바라보는 이곳 삶에서 어떤 의무감을 느끼진 않는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얻는 것이 있으면 포기하는 것이 있듯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얻었다면, 내가 이방인이기에 못 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조급함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느껴진다. 그렇기에 내 먼 미래를 위해서 내가 “꼭” 넘어야 할 산은 없다. 정착에 필요한 특별한 조건이 없다. 이대로여도 좋고. 굳이 뽑자면 이태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위한 자동차 하나 정도 구입해볼까 하는 생각 정도.
SY

자유롭다. 어떤 마음가짐이 이런 삶을 만드는가?
SW

나 스스로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내가 가는 이 방향이 맞다고 믿는다. 방향만 맞으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SY

단순하지만 단단한 마음 같다.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정말 많은 선택지를 지나왔을 텐데. 결정을 위해 고려하는 우선순위가 있는가?
SW
일이었다. 내 꿈. 내가 좋아하는 옷 만드는 일이 내 1순위였고 많은 것들이 그 꿈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난 후는 함께 미래를 계획하며 결정하게 되다 보니 1순위는 여자친구. 아니, 1순위 행복. 이 행복은 미래를 여자친구와 함께 계획하는 것이다. 이런 게 되게 좋더라.
SY

이곳 생활을 이어가며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
SW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내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볼 수 없는 것. 군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근데 군대는 끝이 있지 않았는가. 엄청 힘들어도 끝이 있으니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여기서도 더 끝을 생각하려고 한다. 해외 생활의 끝이 아니라, 내 인생의 끝. 우리 모두가 되게 영원히 살 것 처럼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어쨌든 내 인생은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찰나”, 내 삶이 유한하고 또 엄청 짧기 때문에 이런 고민들이....... 지금 내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힘들다. 잠깐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갈 뻔. 매일 아침 내 죽음을 생각한다..... 그런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 위로를 받게 되는 아이러니....... 뭐 이런 거. 뭔지 알지?
SY

끝을 생각한다는 건, 엄청 센데 확실한 위로 같다. 그렇다면 정말 끝 질문! 이승우가 주는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정의.
SW

내 블로그 닉네임이 “외노자 객(客)”이다. 이탈리아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면서, 나 스스로 손님 같다고 느낀다. 내 집 느낌은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한편으로 팍팍한 외노자의 삶이지만 이 땅에서 손님 대접받고 살고 싶은 마음도 담겨 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손님에겐 예의를 지키지 않는가. 하지만 블로그 친구들이 너무 나를 “자객”이라고 부르고 그 이름이 너무 아재 스러워서 이름을 최근에 리뉴얼했다. 새 이름은 “외노자 G(uest)”.






SPECIAL THANKS TO: KEENER

Una Storia Comune
N.1 <SeungWoo Lee>


Photography: Archives from Seungwoo
Interview: Seuyoung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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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불편한 점이 참 많다. 한국 사람들끼리의 대화 속에서는 “한국이었으면~”을 자주 듣는다. 투덜거리면서도 이 땅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분명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이번에 만난 <평범한 사람 이야기> 두 번째 주인공은 몇 가지 단순한 이유들을 이야기한다. 단순화시켜서일까, 방향이 뚜렷하고 그 선택 안에서 유연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읽힌다. 혹여 당신이 만족의 결핍 또는 불안의 과잉을 경험하고 있는가? 특히 그중 많은 부분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문제 삼고 있다면, 과연 나는 ‘나의 선택에 집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역으로 하게 하는, 담담한, 당당한, 단단한 외노자 이승우를 만나보자.

SEOYOUNG AN
자기소개 부탁한다.
SEUNGWOOLEE    
안녕! 이탈리아에 2012년도에 넘어와서 3년 학교 다니고 15년도 말부터 남성복 모델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9월생 처녀자리 이승우라고 한다.
SY
학생 3년, 어땠나?
SW
2012년 7월 13일의 금요일에 밀라노에 왔다. 밀라노에서의 기억은 좋을 수밖에 없다. 학교 다니면서 부모님이 지원해 주시는 돈으로 생활하는데 좋을 수밖에. 남성복 2년 과정을 밟을 때 우리 반 총인원이 15명. 근데 한국 사람이 11명이었다. 나중엔 선생님들이 “여기”, ”저기”라며 한국말을 하더라. 그땐 이게 너무 화가 나더라. ‘내가 지금 어디에 있나’하는 생각 때문에. 그 당시 한국에 클래식 남성복이 한참 붐이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되게 많이 유학을 나왔었다.
SY
3년의 학생 시절에서 6년을 채워가는 직장 생활로 넘어간 그 시점이 궁금하다. 그리고 6년의 속도감도.
SW
처음 밀라노에 왔을 땐 그저 남성복 메이킹을 더 배우기 위해 왔다. 졸업 후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겪는취업난을 지켜보며 이곳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하고 기회가 적은 한국보단 이 땅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도를 해보던 중에 있었다. 학교를 통해 일을 구했고 하다 보니 어느새 5년이 흘렀다. 그 5년 안에서도 처음 인턴 6개월을 거치고 나니 (인간의 바람이 끝이 없듯) 정직원도 돼보고 싶고.. 또 정직원이 되니 흥미롭게도 정직원 안에도 레벨 1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제도가 있더라. 그래서 레벨 하나씩 오르는 재미로 다니다 보면 어느새 여름휴가 맞이하고 휴가 즐기고 돌아와서 다시 일하고 연말마다 레벨 오르는 걸 또 기대하게 되고. 다시 연휴 마치고 일하고 또 여름이 오면 한국 한번 다녀오고. 또 연말 되면 해 바뀌고 또 여름 시즌 준비하다 휴가 맞이하고... 그러다 보니까 되게 금방 가버렸다.
SY
직장 생활의 배경, 레자 소개도 부탁한다.
SW
밀라노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일 때문에 레자라는 시골 동네에서 살고 있다. 처음엔 엄청 두려웠다. 학교에서 이 회사를 소개해 주고 합격 후 “이제 너 레자에 갈 거야”라고 했을 때 난 어딘지도 몰랐다.라고 마죠레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을 해줬지만, 당시 내게 라고(호수)는 꼬모뿐. 레자는 정말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다 알고 지나가면 다 인사한다. 한국 사람은 나 한 명뿐이다. 그냥 뭐 전반적으로 사람이 없다. 첫인상이라 할 거라면 호수, 좋은 공기. 이곳은 내가 직장인의 삶을 시작한 곳이기 때문에 여름이면 카약도 타고, 취미로 테니스도 치게 됐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런 장소는 나와 맞지 않아’라는 생각이 들더라. 노년에 살고 싶은 동네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 너무 누려서 나이 먹고 못 쉴까 봐 겁도 난다.

처음 회사에서 숙소를 제공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나중에 다 잘 될 거니까.. 시골 쪽방 한편에서 살아도.. 이거 다 내 이야기가 될 거고 전부 특별한 소스가 될 거야!’라고 생각하고 왔다. 제공해 준 숙소가 기대보다 좋았다. 아늑했다. 첫 2년 정도는 회사 마치고 집에서 책 보고, 영화 보는 게 전부였다. 그 당시에 1년에 영화를 약 300편 정도 봤다. 밖에서 뭘 할 생각을 안 했다.
SY
곧 떠날 사람 같은 마음으로 있었나?
SW
그런 마음도 있었다. 첫 2년 정도는 이곳은 마치 버스 정류장 같았다. 난 그저 내 버스가 오면 타는 거고, 굳이 내 옆에 함께 기다리는 사람과 친구가 될 필요가 없는 것처럼.
SY
그렇게 6년. 버스를 기다렸다.
SW
버스가 안 오더라. 돈 모아서 비행기도 타고 해야 하는데 버스만 기다리니까. Sciopero(파업)도 많고.
SY
쉬운 선택이 아니다. 타지 생활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데 작은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사는 것, 용기가 많이 필요했을 것 같다.
SW
그렇다. 쉽지 않다. 하지만 남성복 메이킹은 선택지가 제한적이다. 대부분이 밀라노 같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 자리 잡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웬만하면 밀라노에 사무실을 두고 일하며 여성복 모델리스트까지는 같이 일하지만, 남성복의 경우 거의 밀라노 주변 지방에서 일한다. 슈트의 경우에는 멀리 나폴리까지도 간다.
SY
꿈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SW
맞다. 난 어디서 뭘 하든 내가 좋아하는 옷 만들기를 하고 있으면 된다. 선택했으면 집중을 해야지.
SY
일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
SW
한동안 아침형 인간에 꽂혀 있었다. 새벽 5시에 기상 후 30분 조깅. 5시 반부터 30분 동안 언어 공부를 한다. 6시부터 출근 준비 후 독서 조금, 6시 40분에 출근. 출근길에 영어 듣기를 마저 하고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한다. 5시 퇴근 후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책 보고.... 공부 시간 채운다.... 이렇게 한 달 정도 하다가 출근길에 영어 대신 음악을 틀었다. 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순간 나는 내가 총 맞은 줄... 너무 피곤해서 지금 약간 주저앉았다. 요즘은 6시 반에 일어나자마자 주식을 확인. 저금 대신 먹고살기 위해 조금씩 공부하며 투자하고 있다. 아, 스니커즈 시세도 꾸준히 확인하고 있다. 늘 응모할지 말지의 고민을 하며 지낸다.
SY
개인의 전문 분야 이외에도, 다양함으로 꽉 채워 살아가는 인상을 준다.
SW
퇴근 후가 존재하는 삶이라. 시간이 많아 여러 가지 일을 해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직장 생활 하는 사람들이 가장 한국으로 가고 싶은 이유 1순위는 돈인 것 같다. 나 또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요소이다. 일만 보았을 때 충분히 만족하지만, 그에 따른 보상이 나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하게 된 여러 부수적인 일들이 있다. 책도 써보고, 가끔은 빈티지 램프 바이어가 되기도 하고, 블로그 광고료 통해서도 수입을 낼 수 있다고 해서 한동안 활동을 했었다. 근데 구글에서 내게 광고 승인을 안 해줘서. 글 쓸 맛이 나겠나, 안 나겠나. 별거 다 썼었는데. 전문적인 것 부터 취미 수준의 소소한 거리들까지. 하지만 확실한 건 이곳이, 유럽 베이스가 훨씬 부수입의 기회가 많다고 느낀다.
SY
질문을 한 층 더 좁혀보겠다. “외국인”으로 9년째 사는 건 어떤 느낌인가? 궁금하다. 언어, 문화, 인간관계 등 여러 범위 안에서.
SW
9년 차 외국인, 처음 1-2년 차 땐 내가 언어를 못 해도 창피하지가 않았다. 한 3-5년 차가 되면 이게 되게 창피해진다. 어딜 가서 말을 못 한다. 쌓이는 연차에 비해 언어 실력이 비례하지 않을 때다. 계속 공부해야지 하다가 이제 9년 차. 어지럽다. 쓰러질 것 같고. 이런 얘기 하고 싶지도 않다 사실.어쨌든 나도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나름 자기 합리화를 해보자면, ‘나는 이탈리아 꼬마 8세와 비슷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다. 그 친구랑은 한번 해볼 만한 느낌. 억양이나 악센트는 잘 해내고 싶었지만 초반뿐이지 지금은 내가 한국인이니까 나오는 발음대로 당당히 대화한다. 언어는 구조보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콘텐츠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콘텐츠에 집중해서 제대로 전달하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어떤 면에서는 유튜브랑 비슷하다. 고가의 장비로 고화질 4K 영상을 올려도 내용이 없으면 안 보게 되더라. 반대로 저화질에 편집이 좀 별로여도 재밌어서 계속 보게 되는 영상들이 있다. 내 의사소통도 이런 맥락으로 방향성을 잡았다. 화질보다는 콘텐츠! 이탈리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 어렵다. 한때 이태리 친구들과의 교류에서 언어 훈련이나 문화를 배울 수 있다는 기대로 자주 만남을 가지려 노력 했었다. 그중에 예의 없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사실 너무 당연한 건데, 내가 말을 잘 못 하거나 발음이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래도 그냥 눈 감고, 참던 때가 있었다. 지적까지는 넘어가도 그걸로 막 장난치고 무안 주는 친구? 아니 그런 이탈리아놈이 있더라... 지금은 그런 일이 생기면 말을 잘 못 해도 내 의사를 표현한다. “너 왜 그렇게 말해? 나 너랑 말하기 싫다.” 한번 하니 두 번은 쉽더라.
SY
솔직히 나눠주어 고맙다. 외국인이라서 겪은 슬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SW
금요일마다 테니스를 친다. 저 저번 주에 테니스를 치고 나니 엄청 깜깜해져 있었다. 암흑이었다. 함께 테니스를 친 쟈꼬모(17)와 다비데(16)는 어머니들이 데리러 오셨더라. 내(서른 좀 넘음)가 외국인이어서 우리 엄마(58)는 안 오신 거겠지? (한참 웃는다).
SY
서류상 당연히 외국인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또 더욱이 직장 생활을 할수록 자신의 포지션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가벼운 외국인이기도 힘들며 완전한 이민자이기도 힘들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 해뒀는가?
SW
지금까지는 나를 외국인으로 봐주는 게 나도 편하고 좋았다. 근데 여기서 앞으로 더 먼 미래를 본다면 내 책임의 영역은 지금과 확실히 다를 것이다.
SY
특히나 직업인으로서 좀 더 욕심을 내고자 한다면 외국인 앞에 그어져있는 선을 조금씩 침범, 한 단계의 도약이 필요한 것 같다.
SW
공감한다. 실제로 올 초, 고민의 결과로 언어 공부를 더 하기 시작했다. 내 윗선의 상사들은 내가 옷으로 말할 때, 그들은 말로 말하기 때문이다. 나도 솔직히 나중에는 입으로 일하고 싶었다.
SY
그럼에도 언어나 그 외의 부수적인 이유가 현재 직장 생활을 해나가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인다.
SW
옷을 잘 만드니까. 또 손이 빠르고. 내가 일하고 싶어 하는 곳에서 나를 빨리 알아야 할 텐데... 시간 싸움이다.
SY
일을 정말 좋아한다. 일을 계속하며, 이곳에서 더 깊숙이 정착해 살아가야 하는 부담을 느끼는가?
SW
내가 바라보는 이곳 삶에서 어떤 의무감을 느끼진 않는다. 세상이 그렇지 않은가, 얻는 것이 있으면 포기하는 것이 있듯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얻었다면, 내가 이방인이기에 못 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조급함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느껴진다. 그렇기에 내 먼 미래를 위해서 내가 “꼭” 넘어야 할 산은 없다. 정착에 필요한 특별한 조건이 없다. 이대로여도 좋고. 굳이 뽑자면 이태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위한 자동차 하나 정도 구입해볼까 하는 생각 정도.
SY
자유롭다. 어떤 마음가짐이 이런 삶을 만드는가?
SW
나 스스로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지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다. 내가 가는 이 방향이 맞다고 믿는다. 방향만 맞으면 언젠가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
SY
단순하지만 단단한 마음 같다. 선택의 연속인 삶 속에서 정말 많은 선택지를 지나왔을 텐데. 결정을 위해 고려하는 우선순위가 있는가?
SW
일이었다. 내 꿈. 내가 좋아하는 옷 만드는 일이 내 1순위였고 많은 것들이 그 꿈에 의해 결정됐다. 그리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난 후는 함께 미래를 계획하며 결정하게 되다 보니 1순위는 여자친구. 아니, 1순위 행복. 이 행복은 미래를 여자친구와 함께 계획하는 것이다. 이런 게 되게 좋더라.
SY
이 곳 생활을 이어가며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인가?
SW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내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볼 수 없는 것. 군대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근데 군대는 끝이 있지 않았는가. 엄청 힘들어도 끝이 있으니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여기서도 더 끝을 생각하려고 한다. 해외 생활의 끝이 아니라, 내 인생의 끝. 우리 모두가 되게 영원히 살 것 처럼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어쨌든 내 인생은 끝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찰나”, 내 삶이 유한하고 또 엄청 짧기 때문에 이런 고민들이....... 지금 내가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힘들다. 잠깐 다른 시공간으로 넘어갈 뻔. 매일 아침 내 죽음을 생각한다..... 그런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에 위로를 받게 되는 아이러니....... 뭐 이런 거. 뭔지 알지?
SY
끝을 생각한다는 건, 엄청 센데 확실한 위로 같다. 그렇다면 정말 끝 질문! 이승우가 주는 외노자(외국인 노동자)의 정의.
SW
내 블로그 닉네임이 “외노자 객(客)”이다. 이탈리아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면서, 나 스스로 손님 같다고 느낀다. 내 집 느낌은 아니니까. 그리고 또 한편으로 팍팍한 외노자의 삶이지만 이 땅에서 손님 대접받고 살고 싶은 마음도 담겨 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손님에겐 예의를 지키지 않는가. 하지만 블로그 친구들이 너무 나를 “자객”이라고 부르고 그 이름이 너무 아재 스러워서 이름을 최근에 리뉴얼했다. 새 이름은 “외노자 G(uest)”.




Una Storia Comune
N.1 <Seung Woo Lee>



Photography: Archives from Seungwoo 
Interview: Seoyoung 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