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time 8‘ | text&graphic by Nam Jun Kim | illustrations by Stefano Summo
2002년 6월 18일. 활기찬 여름이었다. 나는 밀라노에서 멀지 않은 콜로뇨 몬제세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7 ~ 8살 정도 였고 학교 방학이 시작 되자 당시 모든 이탈리아 아이들 처럼 부모님은 나를 지역 여름 캠프에 보내셨다. 더운 여름을 친구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활동들을 하며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를 난 잊을 수가 없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에서 트라파토니의 이탈리아가 히딩크의 한국과 붙는 날이었다.

킥오프 10분 전에 (이탈리아에선 경기가 12시 30분에 시작이었다) 어느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고 tv 앞에, 뭉처서 응원 할 준비 되어 있는 이탈리아 아이들과 함께 앉혔다. 경기가 시작되고 tv 에선 마치 귀신 들린것 처럼,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흥분한 표정과 음성으로 붉은 옷을 입고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국가대표 팀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때 많은 이탈리아 아이들 가운데 혼자 한국인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보고, 조용히 환호하고, 조용히 응원했다. 내가 한국인 인걸 알고도 도대체 선생님은 왜 그랬을까? 설마 나를 약올리는 거였나? 아직도 생각만 하면 열이 난다. 그 날 처럼 그렇게 외로운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때 월드컵의 절대 주인공의 이야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경기가 어떻게 끝났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축구의 이야기들 중에, 2002년 월드컵 후 안정환 선수 경력의 절정에서부터 가장 외로웠던 순간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안정환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그는 살 집이 없어서 초등학생 때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냈다. 돈암동, 흑석동, 신길동, 부천, 수원 등 한 학기에 10번 넘게 이사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다고 한다. 배불리 먹어본 적도 없고, 옷이 한 벌밖에 없어 일주일에 닷새 씩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했다. “넌 옷이 그거밖에 없니?” 친구들은 그런 안정환을 놀렸다. 그럴 때면 안정환은 “나는 똑같은 옷이 다섯 벌이야” 라고 말했다. 항상 배고팠던 안정환은 수퍼마켓 주인이 되는게 꿈이었다.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정환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는지는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골보다 그 순간에 도달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면 더 잘 알수 있다. 그러나 안정환은 무척 화려한 선수였다. 한국에서는, 아니 아시아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차원 높은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였고 조각 같은 외모에 연예인 처럼 인기가 많았다. 안정환이 아쉬운 은퇴를 선언한 이 시점에서 나는 화려했던 안정환의 선수 생활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확실히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지속적이고 겸손한 안정환의 career라고 볼수있다. 하지만 안정환의 인생이 화려했던 것 만은 아니다. 그 월드컵 후에 화려함 뒤에 가려진 그의 슬프고 외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였다.

월드컵 극적인 골 2년 전에 안정환은 k리그 부산 아이파크에서 활동 하다 페루자의 많은 희망을 품고 이탈리야 세리에 A에 도착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미련 없이 곧바로 떠났다. 선수가 팀을 떠나도록 이끄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새로운 자극에 대한 탐색, 다른 국가에서 경험을 시도하려는 것, 경제적 편리함, 코치가 또 다른 선수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안정환도 다르지 않게 처음에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자, 새로운 팀, 새로운 도시,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을 했을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안정환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벽 보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페루자 측에서는 일본인들이 나타카 히데토시 영입 이후 티셔츠 구입 등 눈에 띄게 구단 매출을 올려준 것에 비춰, 안정환 영입으로도 한국인 마케팅을 기대했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거기다페루자 세르세 코스미 (Serse Cosmi) 코치는 동양인이라고 안정환의 실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것도 한국인을 철저히 무시했던 당시 분위기상 안정환을 인정해 주는 동료는 없었다. 특히 이탈리아 축구 미래의 스타가 될 젊은 청년 마르코 마테라치 (Marco Materazzi)가 안정환을 많이 귀찮게 한 얘기도 있다. 어깨에 8 번 유니폼을 입어 안정환의 첫 시즌에는 경기장을 15번만 보고 4골을 넣었다. 다음 시즌에는 심지어 클럽이 안정환에게 귀한 넘버 10 유니폼을 주었지만 음악은 변치 않았다: 15경기 출전, 1골. 그때 당시 이탈리아 세리에 A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강력한 선수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파올로 말디니, 지네딘 지단, 엔드리 셰브첸코, 에드가르 다비츠, 크리스티안 비에리,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다비드 트레제게, 프란체스코 토티 이 많은 대단한 선수들 가운데 한 순간 만이라도 안정환이 빛나지 못 했던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쉽다.

안정환은 18년 전 그 여름에 서둘러 짐을 챙기고 페루자를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코치가 다른 선수에게 집중하기로 결정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16강에서 2002년 월드컵에 이탈리아를 탈락시킨 극적인 동점 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90분에 경기 결과는 비에리와 설기현의 마지막 골 덕분에 여전히 1-1이었다. 그리고 전반전 추가 시간이 되어야 안정환이 나타난다: 118 ‘분에 정환이는 왼쪽에서 오는 크로스를 해딩으로 지지 부폰을 이기고 역사상 최초로 우리 국가대표 팀은 8강까지 간다. 그래서 2002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은 안정환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이 경기에서 골든골을 넣은 안정환은 이후 괘씸죄에 걸려 페루자에서 방출되고 말았다.



Luciano Gaucci / Getty Images

골이 당시 페루지아의 구단주이자 대표인 루차노 가우치 (Luciano Gaucci)를 화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만! 놈은 페루자에 다시는 발을 딛지 않을 것이다! 놈은 이상 우리 팀에 접근 없다. 나는 놈의 모든 사용 기회 가능성을 취소 하도록 하겠다». 농담이 아니였다. 이 정확한 말들을 6월 19일에 Gazzetta dello Sport에 인터뷰의 보도 되었지만, 당시 온 이탈리아 다른 모든 스포츠 신문, 및 스포츠 아닌 신문에도 게재되었었다. 또 가우치 구단주는 국영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 녀석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샌드위치 하나 없는 잃은 염소 같았다. 자신을 키워준 이탈리아를 몰라보고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 그는 이상 페루자에 머물 없을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안정환에게 살해 협박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안정환 차를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안정환은 짐 정리도 대리인을 시켜서 해야 할 정도로 골든골 하나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샀다. 안정환의 국가 대표팀 영광에서 해임까지, 가우치의 복수가 제공되었었다.
가우치의 말의 대해 안정환은 터키와의 경기 전에 La Gazzetta dello Sport에게 이렇게 답했다: «대표님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이탈리아 오기 전에 빵도 돈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이탈리아가 저를 환영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리에 A 선수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이상은 페루지아에서 뛰고 싶지 않습니다».




La Gazzetta dello Sport, archivio Mercoledì 19 giugno 2002

이 상황에서 코치 코스미는 또한 가우치를 돕기 위해 좀 더 친절하게 안정환의 재능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더 이상 그를 고용하지 않게다고 이렇게 예기한다: «안정환 선수를 구매하지 말라고 요청 할겁니다. 육체적으로 안정환 선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있습니다. 또한 기술적 인 관점에서 볼 때도 몇 가지 사항을 이해 한 것 같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처음 이탈리야에 왔을 때 축구는 상대의 40 미터 골 앞에서만 뛰면 된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지금은 더 현대적이고 유럽적인 개념들을 이해 한 것 같습니다. 좋은 경력을 쌓을 수있는 선수인 것 같아요». 말한 것보다 빨리 안정환은 이미 페루자를 떠나 일본 시미즈 에스 펄스로 간다.

사실 가우치 구단주의 아들인 안레산드로 가우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 모든게 “오해가 생긴 일” 이라며 사과까지 했다. 당시 안정환의 에이전트가 갑자기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유권 분쟁은 페루자 측, 안정환의 원소속팀 부산현대 산업개발 그리고 에이전트의 문제였다고 한다. 어찌 됬건 안정환에게는 미련 없는 그러나 시끄러웠던 이별이였다.


우리는 안정환의 화려한 모습만 봐 왔다. 이탈리아인들은 안정환을 "영입 해줬는데 감사하지 않고 배신한 외국인"이라고만 봤다. 귀공자 같은 외모와 화려한 플레이 때문에 그를 풍족한 환경에서 축구에 매진하는 이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얼굴만 믿고 공 차는 선수로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선수보다도 더 많은 시련이 있었다. 외할머니 품에서 어렵게 자라 빵과 우유를 준다는 말에 처음 축구화를 신은 소년은 훗날 한국 축구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선수로 성장했다. 어느날 안정환은 이렇게 얘기했다: «어릴 적에는 어려운 형편을 많이 원망했어요. ‘아,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요. 하지만 그랬다면 아마 너무 마음이 편해서 쉽게 운동을 포기했을 것 같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독기를 품고 노력해 축구선수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가난에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안정환은 축구 선수로서 브라질인의 전형적인 재능이나, 독일인의 지성 또는 영국인의 우아함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남몰래 땀과 눈물을 흘렸던 시절이 있었기에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한국 축구를 위해, 그리고 지난 세기의 일제 강점기의 고난과 625전쟁을 겪은 후 수십 년 동안 세계 유수의 국가로 성장하기 열심히 노력해온 대한민국 민족을 위해. 어려운 환경을 딛고 지금껏 우리에게 너무나 큰 선물을 준 안정환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는 비록 “pitch”를 떠나지만 언제나 우리의 “FANTASISTA”로 기억될 것이다.